처음 회사에서 콘텐츠 기획서를 만들었던 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눈이 침침해질 때까지 PPT 디자인에 공들였다. 커버에는 근사한 이미지와 함께 ‘최신 마케팅 트렌드 적용 사례’라는 그럴듯한 제목을 달았다. 스스로도 “완벽해!”를 외치며 야근을 불사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떨리는 마음으로 회의실에 들어섰다.
회의실 공기는 살짝 싸늘했지만, 나는 자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팀장님의 표정은 첫 장부터 심드렁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게 뭔데?” 첫 슬라이드의 화려한 제목을 보며 팀장님이 물었다. 그 한마디에 머리가 띵 했다. 나는 장황한 서론과 시장 통계로 빼곡한 페이지들을 넘기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전하고 싶은 핵심은 뒷페이지 어딘가에 숨어 있고, 앞엔 겉멋만 잔뜩 들어있다는 사실을.
결국 그 기획서는 예상보다 빨리 발표를 마쳤다. 팀장님은 친절하게도(혹은 냉혹하게도) 바로 피드백을 주었다. “자료는 많고 폰트도 예쁜데, 그래서 결론이 뭐야?”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동료들은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회의실을 나서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 내 모습은 완전 탈진한 채였다. 첫 기획서 제출의 기억은 이렇게 실패담으로 남았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알맹이보다 포장에 더 집착했다. 예쁜 템플릿, 현학적인 용어, 근사한 인용구… 지금 생각하면 다 쓸데없는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그땐 이런 포장 요소들이 기획서를 그럴싸하게 만든다고 착각했다. 마치 빈 상자에 리본만 요란하게 묶어 놓고 선물이라고 우기는 꼴이었다.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 아마도 첫인상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내용이 부족하니 외형으로라도 때워보려는 마음, 이해한다. 하지만 회의를 거듭할수록 깨달은 게 있다. 겉만 번지르르한 기획서는 금방 탄로 난다. 본질을 감추려 해도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다.
반면, 실무에서 진짜 통했던 기획서들은 이상하게도 심플했다. 어느 날, 다른 부서 선배의 기획서를 볼 기회가 있었다. 페이지 수는 고작 5장 남짓인데,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띄는 디자인도, 거창한 문구도 없었다. 대신 모든 슬라이드에 명확한 한 줄 메시지가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팀장님이 내게 한마디 했다. “저런 게 진짜 기획서지.” 속이 쓰렸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잘된 기획서들은 공통적으로 핵심이 뚜렷했다. 불필요한 배경설명이나 미사여구 없이, 보는 사람이 딱 이해할 만큼만 담겨 있다. 예쁘게 포장하지 않아도, 다들 내용에 집중한다. 오히려 담백해서 신뢰가 갔다.
예를 들어, 한 번은 고객 불만 개선 캠페인 제안서에서 다른 건 다 빼고 첫 장에 이 한 문장을 썼다: “사용자가 정말 답답해하는 문제가 무엇인가?” 그리고 다음 장에 실제 사용자 피드백 한 줄을 적었다. “솔직히 이 앱, 쓰기 불편해요. 필요한 기능 찾기가 너무 어려워요.” 모두가 조용해졌다. 굳이 많은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문제의 심각성이 피부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통하는 기획서는 억지로 설득하지 않는다. 문제를 정확히 짚어내고, 거기에 대한 솔루션을 간결하게 보여준다. 읽는 사람이 “그래, 이거야!” 하고 바로 무릎을 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건 fancy한 연출이 아니라, 메시지의 힘이었다.
그렇다면 콘텐츠 기획서에 정말 중요한 건 뭘까? 화려한 그래픽도, 유려한 문장도 아니다. 이제는 명확해졌다. 내가 여러 시행착오 끝에 얻은 다섯 가지 교훈을 공유해본다
위 다섯 가지는 식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들이다. 한번 쯤 간과하기 쉽지만, 막상 잘 지키면 효과는 확실하다. 나도 한때는 “설마 이게 그렇게 중요해?” 라고 여겼지만, 갈수록 이 원칙들이야말로 흔들리지 않는 기둥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막상 기획서를 쓰려니 여전히 막막하다고? 그럼 실무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작은 팁들을 체크리스트로 정리해본다. 기획서 작성 전에 한 번 점검해보자.
위 체크리스트를 따라 한 번 더 검토하면, 최소한 큰 헛발질은 피할 수 있다. 나 역시 중요한 발표 전날 이 리스트를 훑어보며 스스로 “이 정도면 괜찮아” 하고 마음을 다잡곤 한다.
마케팅 세계에도 유행이 있고 폼이 있다. 때로는 번지르르한 캠페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실무를 하면 할수록 느끼는 진리는 하나다. 결국 오래 남는 건 진심을 담은 콘텐츠와 기획이라는 것.
한때는 멋진 기획서 한 번 만들어서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보니, 그때 칭찬보다도 소중한 건 매번 고쳐나가며 배운 과정이었다. 지금도 가끔 PPT 템플릿을 예쁘게 꾸미는 내 자신을 발견하면 피식 웃는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포장은 적당히, 본질에 집중하자.”
그 날 회의실을 나와 마셨던 쓰디쓴 아메리카노 맛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이제는 그 쓴맛의 의미를 안다. 기획의 세계에서 쓴맛은 성장통이고, 그 후에야 비로소 달콤한 성과를 맛볼 수 있으니까.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자. 중요한 건 한 번 포장을 잘못 붙였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을 담을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우리의 진정성이라는 것을. 그 진심만은, 기획서 너머 상대방에게 꼭 전해지길 바라며.